천문학

천문학에서의 허블우주망원경(1)

-전문상담원- 2020. 4. 18. 18:39

허블우주망원경(Hubble Space Telescope, HST)은 1990년에 지구 저궤도로 발사된 우주망원경으로 현재도 가동 중이다. 허블은 최초의 우주망원경은 아닐지언정 가장 크고 가장 쓰임이 많은 우주망원경 중 하나이며, 천문학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연구 도구이자 공공관계 구축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허블의 명칭은 천문학자인 에드윈 허블의 이름에서 본뜬 것으로, 콤프턴 감마선 관찰위성, 찬드라 엑스선 관찰위성, 스피처우주망원경과 함께 NASA의 거대관찰위성 Great Observatories의 일원이다.


2.4미터의 주거울을 갖춘 허블의 주요 장비 네가지는 근자외선, 가시광선, 근적외선 스펙트럼을 관찰한다. 허블의 궤도는 지구의 대기권의 방해를 피해 지상 망원경과 비교해서 배경광의 영향을 대폭 줄일 수 있으므로 해상도가 매우 높은 영상을 얻는데 적합하다. 허블은 역대 가장 상세한 가시광선 영상들을 촬영함으로써 먼 시공간의 모습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우주의 팽창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한 것처럼, 허블이 이룩한 수많은 관측은 곧 천체물리학 난제의 돌파구로 이어졌다.


허블은 미국항공우주국 NASA에서 유럽우주기구의 협력으로 건조되었다. 우주망원경과학연구소 (STScI)는 허블의 관찰대상을 지정하여 관찰결과 자료를 처리하는 역할을 하고, 고다드우주비행센터는 우주선을 조작하는 역할을 한다.


우주망원경의 개념은 1923년이라는 이른 시기부터 등장했다. 허블은 1970년대에 투자 받아 1983년에 발사되기로 계획되었으나, 계획이 기술문제로 인한 지연과 예산 문제, 그리고 1986년 챌린저 참사로 난항을 겪는다. 1990년에 최종적으로 발사되었을 때, 허블의 주거울이 정확하지 않게 설치되어 망원경의 성능에 지장을 주었다. 1993년 정비 임무를 통해 원래 설계되었던 성능으로 광학적 수정이 이루어졌다.


허블은 우주비행사를 통해 우주에서 정비할 수 있도록 설계된 유일한 망원경이다. 1990년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의 발사 후, 주요 장비 다섯가지를 포함하여 망원경의 수리, 업그레이드, 시스템 대체를 위한 5회의 우주왕복선 임무가 뒤를 이었다. 다섯번째 임무는 2003년의 컬럼비아 참사 이후 안정성 차원에서 취소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공적인 논의가 빠르게 이루어진 뒤, 마이크 그리핀 NASA 국장이 다섯번째 정비 임무를 승인하여 2009년에 완수된다. 망원경은 2018년 현재도 운용 중이며, 2030년-2040년까지 계속 운용될 것이다. 허블의 뒤를 잇는 제임스웹우주망원경 (JWST)은 2021년 3월에 발사될 예정이다.






구상 및 설계와 목표


제안 및 선구자

헤르만 오베르트는 로버트 H. 고다드와 콘스탄틴 치올콥스키와 함께 현대 로켓공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1923년에 망원경이 로켓을 통해 지구 궤도로 추진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언급한 Die Rakete zu den Planetenräumen ("행성간 우주로의 로켓")을 발표한다.


허블우주망원경의 역사는 1946년이라는 이른 시기, 천문학자 라이먼 스피처의 논문 "Astronomical advantages of an extraterrestrial observatory" (지구외부 천문대의 천문학적 이점들)에서 시작된다.  스피처는 이 논문에서 우주 천문대가 지상 망원경을 압도하는 두가지 큰 이점을 주장했다. 첫째로 물체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최소 길이인 각분해능이 별의 반짝임을 유발하는 대기의 난류와는 상관 없이 회절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2.5 m의 거울을 갖춘 망원경에 대해 이론적인 회절한계 분해능이 약 0.05 초인데 비하여, 당시 지상 망원경은 0.5-1.0 초의 분해능이 한계였다. 둘째로 우주망원경은 지구 대기에 강렬하게 감광되는 적외선과 자외선을 관찰할 수 있다.


스피처는 경력의 상당 시간을 우주망원경의 개발에 힘썼다. 1962년, 그는 미국국립과학회의 한 보고서에서 우주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우주망원경의 개발을 추천하였고, 1965년에는 거대우주망원경에 대한 과학적 목표를 정하는 업무의 위원회장으로 위임했다.


우주 기반의 천문학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과학자들이 로켓공학에서 이루어진 기술발전을 응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최초의 태양 자외선 스펙트럼을 1946년에 얻고, 미국항공우주국 (NASA)이 1962년에 자외선, 엑스선, 감마선 스펙트럼을 얻기 위해 공전태양천문대 Orbiting Solar Observatory (OSO)를 쏘아 올린다. 영국이 에어리얼 우주 계획의 일환으로 공전태양망원경 Orbiting Solar Telescope을 1962년에 발사하고, 1966년에 NASA는 처음으로 공전천문대 Orbiting Astronomical Observatory (OAO)를 발사했지만 OAO-1의 축전지가 3일 뒤에 고장나면서 임무가 중단된다. 뒤이어 OAO-2는 1968년에 발사되어 본래 계획된 수명의 정확히 1년 뒤인 1972년까지 여러 별과 은하의 자외선 관측을 수행했다.


OSO와 OAO 임무는 우주망원경이 천문학에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입증해 보였다. 그 후 NASA는 1968년에 직경 3m 주경의 우주반사망원경의 확고한 건조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1979년 발사를 목표로 함과 동시에 임시로 대형공전망원경 Large Orbiting Telescope 또는 대형우주망원경 Large Space Telescope (LST)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계획들은 비용이 많이 쓰이는 계획의 기능 수명을 늘리기 위해 망원경에 대한 유인 정비 임무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동시에 착수된 재사용 가능한 우주왕복선의 개발 계획은 이 기술이 곧 실현 가능한 기술이 될 것임을 암시했다.



비용 요청

OAO 계획의 지속적인 성공으로 천문학계에서 LST가 주요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만장일치로 지지 받는다. 이를 위해 NASA는 1970년에 위원회 두 곳을 설립한다. 하나는 우주망원경 계획의 공학적인 부분을 계획하기 위한 곳이고, 다른 하나는 임무의 과학적 목표를 결정하는 곳이다. 위원회가 설립된 이후 NASA가 겪은 다음 문제는 기구의 개발 비용을 지원받는 것이었는데, 우주망원경 건조에는 그 어떤 지상망원경보다도 더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미국 연방의회는 망원경 제작에 제시된 예산의 여러가지 면을 집요하게 캐물었고, 계획 단계에서 당시 망원경에 탑재될 기구와 장비를 상세하게 연구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지출을 줄이도록 강요했다. 1974년에 연이은 재정지출 삭감으로 연방의회는 망원경 계획에 예산 분배를 전면 취소하였다.


이 때문에 미국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전국적인 청원 활동이 이루어진다. 수많은 천문학자들이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직접 대면했고, 대규모 서면 운동이 열리기도 했다. 미국 국립과학회는 우주망원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제출하기까지 했다. 결국 상원이 하원에서 승인했던 원래 예상비용의 절반을 승인하면서 끝을 맺는다.


재정지원 문제로 계획의 규모가 어느정도 축소되었기 때문에, 계획된 주거울의 직경은 3 m에서 2.4 m로 줄어든다. 그래서 개발은 망원경 장비의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18] 더욱 작고 효율적인 배치가 가능한 방향으로 진행되며, 주요 위성에 쓰이는 시스템을 시험하기 위해 제안된 실험용 1.5 m 우주망원경의 계획이 취소된다. 그리고 비용 문제는 NASA와 유럽우주기구 (ESA)의 협력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ESA는 제작 비용과 망원경에 설치될 1세대 기구 하나, 기구의 동력원이 되는 태양전지까지 제공하였다. 이외에도 미국으로 망원경을 제작할 전문 인력까지 파견했다. 대신에 망원경의 운용 시간의 최소 15%를 유럽 천문학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조건이 붙었다. 미국 국회는 최종적으로 1978년에 3,600만 미국 달러의 재정지원에 승인했으며, 1983년 발사를 목표로 LST의 설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망원경의 이름은 우주의 팽창을 발견함으로써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적 혁명 중 하나를 이룩했던 에드윈 허블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다.